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나다 요시노리 (문단 편집) == 생애 == || [youtube(I_rWwTAaDsM?ecver=1)] || || [[NHK]]에서 제작 방송한 카나다 요시노리 추모 1주기 방송 || 1969년, 극장용 만화영화 [[하늘을 나는 유령선]]에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린 작화(거대 로봇 괴물 고렘이 빌딩을 때려 부시고, 전투기 콕핏 안의 파일럿 시점에서 고렘을 향해 공격해 가는 장면, 탱크가 폭주하는 장면)에 충격을 받고, 애니메이션 업계로 들어서는 계기가 된다. [[키무라 케이이치로]]의 [[어택 넘버 원]]도 좋아해서 고등학교 2학년 때의 노트에는 어택 넘버원의 일러스트가 다수 그려져 있고, 이때부터 뛰어난 그림 실력을 엿볼 수 있다. 훗날 보여지는 그의 특유의 액션 연출 기법은 키무라 케이이치로의 영향이 크게 느껴진다. 애니메이터 통신교육을 받은 후, 1970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토에이]]에 계약사원으로 입사한다. 이때 [[겟타로보]]에 참여하면서 애니메이터 [[노다 타쿠오]]를 만나 그림을 전수받는다. 노다 타쿠오 외에 자신의 스승으로 거론 하는 인물로는 [[아라키 신고]], [[코마츠바라 카즈오]]가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기술, 구도, 연출법을 전수받은 것이며 자신의 화풍은 [[키무라 케이이치로]]와 [[코바야시 오사무(1945)]]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70년대 중반부터는 프리랜서 원화맨으로 활동하면서 개성있는 표현으로 아니메 팬들에게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겟타로보]] 시리즈나 [[대공마룡 가이킹]], [[무적초인 점보트3]], [[무적강인 다이탄3]] 등의 로봇 애니메이션으로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한 이후 [[은하철도 999]], [[우주전함 야마토]], [[환마대전]] 극장판 같은 극장용 애니메이션에서 메카작화와 특수효과 장면 등에서 활약했다. 특히 우주전함 야마토 시리즈에는 완결편까지 대부분의 작품에 참여한 간판 애니메이터였으며 본인도 시리즈에 애정이 컸다고 한다. 한편 오프닝 전담으로 만들어낸 오프닝도 여럿 있으며, 그런 오프닝들은 카나다 요시노리다움이 한껏 묻어난다. 당시의 애니메이션 전문잡지에서는 카나다 요시노리를 자주 다루었고, 애니메이터로써는 이례의 팬클럽까지 결성되는 '''스타 애니메이터'''였다. 업계에서도 그는 매우 유명해서 데뷔가 5년도 지나지 않았던 20대 초반의 신인 애니메이터였던 그에게 팬들이 몰려와서 제자로 삼아달라고 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하지만, 원안과 각본, 디자인, 실질적으로 감독직까지 맡은 OVA용 작품 [[BIRTH(애니메이션)|BIRTH]]는 실패하고, 애니메이터로는 일급이지만 그 외의 재능에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연출가로서도 재능은 매우 뛰어났다. 크레딧만 안 되었지 그가 직접 [[콘티]]까지 그린 경우가 꽤 많았다고 한다. 연출력이 없던 게 아니다. 그러나 짧은 장면, 단편 에피소드 위주로 활동을 해서 장편 작품 전체를 연출하는데는 미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부 장면만 맡거나, [[아이캐치]] 기준으로 A파트 B파트를 나눠 클리아막스인 B파트를 주로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때문에 장편 연출 실력이 크게 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슬럼프로 방황하다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때부터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 참여하여 많은 명장면들을 만들어냈다. 작품 내용상 비행 장면을 넣은 건 미야자키 하야오였지만 그 비행장면들을 감탄 나오게 그려낸 건 카나다 요시노리였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은 1997년의 [[모노노케 히메]]까지 원화맨으로 참여했다. 이 무렵 타카하타 이사오로부터 원화 카시라(頭)라는 이전까지는 없었던 직책명을 부여받고, 이 후 '카시라'라는 닉네임으로 불리운다. 사실 [[미야자키 하야오]]와는 정식으로 지브리 작품에 손을 대기 전부터 인연이 있었다. 카나다가 토에이 제작의 1982년작 [[FUTURE WAR 198X年]]의 메카 디자인 겸 메카 작화감독의 의뢰를 받았는데, 느닷없이 지금까지 일절 면식도 없었던 미야자키 하야오한테 "좀 제대로 된 일을 맡아라"[* 냉전중이었던 당시의 시대상을 배경으로 제3차 세계대전을 그려낸 작품이었는데, 제작준비 단계에서 플롯이 유출되면서 애니메이터 노동조합이 제작을 거부하거나 학부형들이 제작을 반대하는 등 사회적인 문제로 발전하였다. 이유는 전쟁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게 리얼하단 이유로 이것이 자칫 '전쟁이란 것이 멋있고 재미있는 것으로 보일 가능성이 있다'라는 것. 전쟁영화가 난무하는 요즘 기준으로 보자면 내용 자체는 딱히 뭐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일본이 세계최고의 반전국가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완성된 작품은 수정된 각본이었고, 처음 예정된 각본은 우익의 주장을 담고 있었다. 이무렵 한 애니메이션 잡지에서 [[야스히코 요시카즈]]가 이에 관련된 글을 기고한 적도 있었다.]고 충고 전화가 온 것. 카나다는 당시 작품에 참여하긴 했지만, 스탭롤에는 자신의 이름을 집어넣지 않았다. 90년대에는 [[TVA]] 제작 현장에도 복귀했지만, [[우츠노미야 사토루]], [[이소 미츠오]] 등의 영향으로 [[리얼리즘]]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제작 현장의 환경은 바뀌져 있었다.([[우츠노미야 사토루]]는 [[조상님 만만세]], [[AKIRA(1988)|AKIRA]], [[이소 미츠오]]는 [[기동전사 건담 0080: 주머니 속의 전쟁]]으로 유명해진 애니메이터로 불필요한 동화(動畵)를 줄이고[* 심지어 이소 미츠오는 원화만으로 애니메이팅을 하였다. 그런데 알고보면, 원화만으로 작화를 하는 것은 카나다 요시노리가 먼저다. 은하선풍 브라이거의 오프닝은 나카누키 원화(동화를 집어넣지 않은)의 선구적인 시도로 기존의 원화 사이시에 동화를 끼워넣야 한다는 개념을 파괴한 연출이었다.] 리얼한 묘사를 중시했는데, 이는 카나다 요시노리의 방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는 TV에서 방영하고 한번 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디오 판매와 렌탈을 염두에 두어서, 작화현장은 그림의 통일감과 리얼함을 중시해서 카나다처럼 개성있고 자유로운 착상의 원화는 수정당하기 일쑤였다. 지브리 작품 참여 이후로는, [[컴퓨터 그래픽스|3D CG]]에 매력을 느껴, CG에서의 새로운 표현영역에 도전한다.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 극장판으로 [[스퀘어]]와 인연이 닿은 이후 애니메이션 쪽을 떠나 스퀘어에닉스의 게임 쪽에서 활동했다. 예로 [[파이널 판타지 13]]의 경우에도 카나다가 직접 3D 레이아웃을 잡아주었다. 그러다 2009년 7월 21일, 57세의 아직 이른 나이에 그 전날까지 일을 했는데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주변인들은 카나다는 술을 매우 좋아했으며 그래서 건강을 해친 것 같다고 증언한다. 같은 해 8월 20일, '카나다 요시노리를 송별하는 모임'에는 애니메이션업계 관계자 800명과 일반인 팬 300여명이 참석했다. [[노다 타쿠오]], [[안노 히데아키]], [[린 타로]]가 조사(弔辞)를 낭독했다. 그의 죽음을 기리며 [[이마이시 히로유키]], [[아메미야 아키라]], [[요시나리 요우]] 3명의 애니메이터들이 추도 동인지를 내기도 했다. 제목은 [[야마토여 영원히|카나다 요시노리여 영원히]]. 이후 동년 12월 제13회 문화청 미디어예술제 특별공로상을 수상했고, 2014년에는 도쿄 애니메이션 어워드 페스티벌 애니메이션 2014의 공로 부문에 선출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